150여 개가 넘는 후에 왕궁의 건물들을 지금은 볼 수 없어
안타까운데 오래된 사진으로나마 남아 있어 그 사진을
둘러보았습니다.
아직도, 복원 중인 각종 궁들은 얼마나 걸릴지 모를 정도로
더디게 그 작업이 진행이 되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빨리빨리가 여기에 정착이 되었다면
이미 복구가 되고도 남았겠지만, 여기 베트남은 천천히
그리고, 여유 있게 진행이 되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후에 왕궁을 둘러보았습니다.
비도 내리니 , 그 모습이 더 애잔하게만
느껴지는 하루였습니다.
재미난 사실 하나를 알려드립니다.
베트남 어디를 가도 거지를 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정부에서 거지를 발견해서 신고를 하면
포상금을 주기에 거리에서 거지를 볼 수 없는현상이 있더군요.
사회주의 국가라 그런 정책을 펼 수 있나 봅니다.
마약이 성행하지만 거리에서 마약에 찌들어
홈리스로 생활하는 이들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럼, 오늘도 어김없이 출발합니다.
여기는 건성전이 있던 자리로 황제의 침전이었던 자리였는데
근정전 바로 뒤에 자리한 거대한 규모의 궁전이었지만
지금은 폐허가 되어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황제의 침전답게 1.5m 정도의 석조 기단 위에 세워져 있었으며,
3개의 회랑들과 연결되어 있었고 7개에 달하는 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붕은 황금빛 기와로 씌워져 있었으며,
문은 유리로 만들어져 왕궁 내부에서 가장 화려하였으며
뒤쪽으로 정원과 후궁들의 궁전으로 바로 갈 수 있게
기와 회랑이 만들어져 있었다고 전합니다.
왕 중에는 150여 명이 넘는 부인을 두고 향락에
젖어 사는 왕도 있었는데 그 후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습니다.
또, 다른 왕은 후손을 두지 않기 위해 왕비와 잠자리를
갖지 않았는데 , 들리는 이야기로는 동성애자였다는
이야기가 전설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흐엉강을 사이에 두고 전쟁을 치렀는데
후에성은 강북에 있었습니다.
미군과 남 베트남군은 강남 쪽에, 베트콩은
강북에 있는 후에성에서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 화려했던 통일 베트남의 왕조를
오래되고 빛바랜 사진으로만 접할 수 있었습니다.
앞쪽으로는 물이 채워진 얕은 연못과 분수가 있었으며,
주변에 꽃을 심어 매우 다채로웠다고 하는데
1947년 2월 전소하여 현재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여기가 바로 호수와 후궁들의 궁으로 가는 회랑이었던 걸로
추정을 합니다.
어느 나라나 문관보다는 늘, 무관을 곁에 두고
치정을 한 게 공통사항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 중국 여행자가 실내인데도 우산을 펴 들고 가면서
다른 이에게 불편을 주길래 우산 좀 접어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을 했습니다.
회랑에도 이렇게 문을 모두 달아 놓았는데
아무래도 비가 잦으니, 이렇게 한쪽만이라도
문이 있다면 왕의 행차가 비에 젖을 일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곤태전이 있던 옛 터로
타 궁전과 비슷하게 황금빛 기와로 덮여 있었으며,
앞에는 정원과 나무들이 심겨 있었으며
1947년 전투 도중 폭격을 맞아 사라져 현재에는
기단부만이 남아있습니다.
왕릉들은 후에 시가지 바깥 교외에 퍼져있으며
베트남 전쟁의 피해를 덜 받은 편이라
보존상태가 왕궁보다 좋은 곳도 많습니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 봉분과 일부 구조물만 있는
한국식 왕릉과 달리 건축물이 좀 더 많은 게
베트남 왕릉의 특징이고 사실상 별궁에 가까운 곳도 있습니다.
1947년 프랑스군이 후에 왕궁을 찬탈하고자
베트남인들과 전투를 치르는 바람에 일부 후에 왕성이 파괴되었으나
이는, 그 시작에 불과했는데 바로 베트남전 당시 미군은
후에 왕성에 대한 융단 폭격이었는데, 무자비한 미사일을
쏴서 결국, 완벽한 폐허를 만들었습니다.
이게 이름하여 “구정 대공세 작전”이었습니다.
치사하게 명절날 대대적인 공습을 감행했답니다.
후에는 약, 150여 년 간 응우옌 왕조의 중심지로 자리하였으며,
그 절정기에는 수많은 전각들과 누각, 그리고 유럽식 건물들까지
들어서며 수백여 칸에 달하는 거대한 왕궁으로서
상당히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기가 다양했네요.
우리나라에 없던 도끼 무기도 등장을 하네요.
관우의 언월도는 안 보이네요.
베트남은 기나 긴 바다를 접하고 있으며, 수많은 강들이 많아
배에 대한 발전도 놀라웠습니다.
각종 해전도 발발했는데 우리나라 이순신 장군감은
없었나 봅니다.
1880년대에는 프랑스군이 쳐들어오고, 응우옌 왕조의 힘이
유명무실해지고 황제의 권한이 바닥으로 추락하면서
후에 왕궁 역시 함께 쇠퇴기를 맞았는데, 황제는 프랑스의 꼭두각시로
전락하면서 자기 앞가림에만 급급한 처지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래도 프랑스는 일본처럼 경복궁이나 창경궁을 허물거나
동물원으로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창경궁을 한낮 동물원으로 만들어 왕의 위신과 조선의 전통을
철저하게 말살한 일제의 잔혹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임금님이 사시는 곳을 동물원으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공개를 하는 황당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지금의 창경궁을 동물원 창경원이라 낮춰 이름을 부르게 하였는데
정말 기도 안 막히는 행위였습니다.
왕이 후궁들과 산책을 하며 시를 짓거나
음주가무를 즐겼던 호수입니다.
바로, 옆에는 다양한 궁들과 도서관이 가까이 있어
왕이 산책을 즐기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었습니다.
후에 왕궁을 돌아보면서 얼마나 극악한 일본이 우리에게
치욕스러운 만행을 저질렀는지 잠시 되돌아보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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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서 직접 관리하는 얼어버린 호수를
스케이트장으로 조성을 하여 시민들이 겨울이라고
집에만 있지 말고 나와서 스케이팅을 즐기라고
조성한 다운타운에 있는 무료 스케이트장입니다.
3분 영상입니다.
늘, 시장은 시민들의 건강과 안전을 최우선하는
정책을 펼치는데, 다양한 아웃도어 행사들도 주간 단위로
주관을 하며 모두 무료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qC1Fdim6VM